길바닥 위에 쓰러져있던 너를 돕고 싶었어
어떤 숙명에 휩쓸려왔고 여태껏 어떤 방황을 해왔던 건지 알 수 없어서
나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고 고개를 크게 양 옆으로 흔들며
하늘을 올려다보니 문득 눈물이 흘러넘치네
22/7 -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TVA 1기 13화 스포일러, non-CP
“돌아갔어.”
“응? 그러니까 아직 안 왔대도.”
“돌아갔어. 저쪽 세계로. … 종언제, 토르 님의 아버지가 데리러 와서.”
“……그게 무슨,”
수 초 전까지만 해도 별 일 없다는 듯 초연한 표정을 짓던, 그 드래곤의 주인, 코바야시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아, 올 게 왔구나. 어렴풋이 눈치야 채고 있었다. 행방불명이라느니, 저쪽 세계와는 연락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던 토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코바야시의 꿈이, 선명하지는 않더라도 분명하게, 그 인식을 더욱 확고히 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 아기 참새같이 조잘조잘대는 톤과 다르게, 지금 여기서는 그 누구보다도 코바야시를 배려하려는 마음이 분명히 엿보이는 짧은 말로 그 전 말을 이어나가는 칸나의 “아마,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종언제의 말은 거스를 수 없어…” 따위의 말은 몸이 물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먹먹해서 들리지도 않았다. 코바야시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아주 역력하지는 않았으나, 순식간에 넋이 나가버린 그 표정은 도무지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코바야시는 어안이 벙벙한 눈으로 칸나를 오 초 정도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느릿하게 정면으로 돌려버리고 안경을 두어 번 고쳐 쓰더니 제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 늘어뜨렸다. 기껏 정돈해놓았던 머리인데, 그 한 번의 움직임으로 많이도 엉켰는지 원래 제 상태로 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꺼져서 검은 화면만이 있는 TV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막상 보자면 그리 미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그저 조금 놀란 듯 보이는 그 얼굴은 고개를 떨구고, 여느 때처럼 친절이 서려있는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세상에. 그렇구나.”
그날은 음, 딱 1년 전 즈음이었던 것 같다. 토르가 코바야시의 삶에 며칠도 지나지 않아 녹아들었던 것처럼, 반대로 코바야시의 삶이란 수용액에서 토르가 석출 되기까지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며칠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 아니, 사실 실제로 코바야시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평소와 같은 자세와 같은 태도로 임원들을 대하고, 모니터를 바라보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또 터벅터벅 걸어서 인파에 휩쓸리다 열차에서 내리면 칸나가 자신을 맞아주는, 그리고 또, 거기에 언제나의 미소로 화답을 해주는…. 가족같이 지내던 존재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는데 어떻게 이리 살아갈 수 있느냐, 그거야 당연지사였다. 코바야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코바야시는 정신력이 강한 인간이었고, 그걸 제외하고도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과로 인해 토르에 관한 걸 생각할 시간이라고는 자기 전 자투리 시간이 고작이었다. 코바야시에게는, 그 일방적인 이별을 곱씹을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제 곁에 있는 사람이, 안 될 것을 알기야 한다만 그럼에도 감히, 자신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남아있기를,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게 다였다. 토르가 없어진 코바야시의 삶이란 그랬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별에 내색하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던 코바야시였다. 하지만 그날은 좀처럼 잠이 오질 않던 밤이었는데, 갑자기 방 문 너머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거센 바람이 휘몰아 닥치는 것이다. 코바야시는 또 골칫덩어리가 들어왔나, 어차피 또 토르의 지인이겠거니 하고 생각했건만, 평소 같았으면 이 인원에서 더 플러스가 되었을 텐데 어쩐지 줄어들어있는 것이다. 차갑게 식은 바닥을 맨발로 천천히 거닐다 문득 정신이 퍼뜩 들어 베란다 너머를 올려다보면 너무나도 익숙해진 그 흰 날개가 저 멀리 날아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알고야 있다만, 익숙해졌다고,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만 코바야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제 사람을 안고 가버린 밤바람 속에서 잠시 동안 속으로 오열해야만 했다. 꿈 밖에서 식은땀을 흘리는 코바야시를 발견한 칸나가 한참을 흔들어 깨워야 코바야시는 황급히 눈을 뜨며 일어나는데, 잠에서 덜 깬 눈으로 칸나의 얼굴이며 손이며 더듬다 겨우겨우 안도하는 태동이 칸나가 보기에도 그간의 외로움을 쏟아내는 것으로 비쳐, 칸나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런 코바야시를 제 작은 손으로 안아 토닥여주는 것이 전부였다.
하루는 오랜만의 철야였다. 똑부러지는 성격의 코바야시가 그럴 일이 정말 드문데, 생각해보면 그날도 그랬던 것 같다. 스트레스에 취해 정신이 나가서 내려야 할 역도 알고 있었으면서 지나치는 것도 모자라, 출입 금지 구역인 산까지 들어갔던 게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코바야시도 또한 ‘토르와 만났던 날도…, 대강 이랬었던가.’ 따위의 생각을 하며, 멈출 생각 없이 그저 들어가는 대로 술을 들이켰다. 토르가 떠나간지 정확히 일주일 되는 날이었다. 그 전날에는 안 그래도 연초라 업무가 파도처럼 밀려들어온 탓에 밤늦게까지 잔업을 해야 했으며, 결국 주말인 오늘도 불려 나가 특근을 해야 했다. 육체적인 피로는 고사하고, 이틀이나 집을 비우다시피 해 집에 홀로 있을 칸나가 걱정이 되어 온갖 신경이 그리로 쏠렸다. 적어도, 적어도 토르가 집에 있었다면 한시름 마음이 놓였을 텐데. 코바야시는 급한 걸음으로 집에 들어와 새근새근 잠들어있는 칸나를 보고 나서야 너덜너덜해진 심산을 술로 달랠 수 있었다.
“타키야 군 부를 걸 그랬나……. … 으응, 그래도 그건 아니지….”
외로움에 사무치는 건 상당히 오랜만이었다. 작년 이맘때 쯤만 해도, 분명 지금보다도 더욱 혼자였을텐데 이렇게까지 홀로 있다는 것에 슬퍼해본 적은 없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거에 아쉬움을 느끼는 것보다, 가지고 있었던 것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슬픔과 공허함이 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에 술까지 들어오니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아 죽을 노릇이다. 식탁 앞이니 망정이지 밖이었으면 제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였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과음을 한 건 오랜만인데. 토르…, 그만 마시라고 말할 때가 됐는데. 평소의 취한 코바야시답지도 않게 얌전히 몸을 앞으로 기울여 맥주캔만을 붙잡고 속으로 서글퍼했다. 쓰러지다시피 몸을 웅크리기 직전 코바야시의 눈에 보인 것들은 엉망이 된 집안과 제 앞에 쌓여서는 널브러진 일회용 용기 정도였다. 미안해, 칸나…. 역시 나는 좋은 어른은 못 되는 것 같아. 거의 신음하듯 한탄하자니, 그 소리를 또 제 귀로 듣자니 버티기가 힘들어져 잠시 침묵한 채 눈물을 흘렸어야 했다.
거듭 말하지만, 코바야시는 그 자신이 생각하기보다도 정신력이 강한 인간이었다. 다시 말해 하루 정도 토르가 없는 날을 천천히 맛보고 슬픔에 잠겨있었다 한들 그 한순간 품었던 심상의 파도에 휩쓸릴만한 인물상은 아니기에, 그때의 대한 후회는 저린 듯한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우고 처음 제 주변을 둘러볼 때 정도가 다였고 곧장 그 전날 자신이 부렸던 투정은 전부 치우기로 한다. 쓰레기봉투를 한 장 집어 펼치고 씻어놓은 맥주 캔들을 차례대로 욱여넣는다.
캔 하나.
다림질은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둘.
내가 밀크티를 우리는 법을 알고 있던가?
셋.
커피는 여태 어떻게 탔었지?
넷.
쓰레기 배출 요일이 언제였지?
다섯.
…오므라이스, 어떻게 만드는 거였더라.
“… 혼자서 많이도 마셨구만….”
사실 지금도 숙취 탓에 죽을 지경이긴 하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몸은 제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고 허리도 아프고, 제대로 세수를 할 정신도 안 된다.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코바야시는 올곧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맥주 캔들을 담으면서 드는 생각들에 대한 감상은 <토르가 돌아왔으면 좋겠다> 대신 <처음부터 다시 해야겠다>가 자리 잡혔다. 스물다섯 쯤 됐으면 제 앞가림은 할 줄 알아야지, 내가 지금까지 안일했던 거야. 게다가 지금은 칸나까지 있잖아…. 하지만 그리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토르가 있었다. 처음부터 그대로였음 얼마나 좋았겠어, 계속 공허한 채로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이제 와서 다시 내 가슴에 구멍을 뚫어서 뭘 할 셈이야, 토르가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가 헛소리를 내뱉지 않았더라면… 따위의 생각들만이 되풀이되고 있었고, 그 답은 몇 번을 풀어도 나올 생각을 않았다. 결국은 오늘도 자신의 머릿속을 비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겨울이 물러날 시기가 오지 않은 탓에 코바야시가 뱉는 한숨들은 전부 새하얀 미련이 되어 코바야시의 뒤편으로 흩어졌다. 오늘 아침도 간단하게 먹을까. 칸나가 뭘 먹고 싶어 했더라? 가라아게는 슬슬 질렸을 텐데. 토르가 있을 때는 무얼 많이 먹었었지, 된장국? 아, 안 되겠다. 계속 이런 생각만 하게 돼. 머릿속으로 쳇바퀴만 돌리던 코바야시는 눈을 질끈 감고 제 고개를 휘휘 저어 애써 다른 곳으로 사고를 돌리려 해본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코바야시는 훌륭히 한 사람의 몫을 해낼 수 있는 사람임에도 토르의 손을 바라게 되는 건, 토르가 코바야시에게 있어 그래도 소중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그 이외에 있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조금은 소중한 사람에 대한 회한을 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은, 진심 어린 정을 천천히 써내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이 그즈음까지 미칠 때면 코바야시는 이미 캔이 담긴 봉투를 저 멀리 분리수거장에 던져버리고, 집을 나설 때보다 묵중하고 어딘가 바로잡힌 걸음걸이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토르. 네가 자의로 간 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어.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돌아올 수 없다면 고통보다는 평온함이 낫지 않을까. 우리의 이해가 어디까지 미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네가 너의 전부라 여기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기꺼이 버려도 괜찮아. 본디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라는 것은 그런 거잖아. 한 순간 격렬하게 불타오르다가 언제든 꺼질 수 있는. 하지만 말이야, 토르. 나는 우리의 말이 타버린다 하면 그 잿더미를 떠안고 있게 될 것 같아. 언젠가 너에게로 환원될 그날까지. 그러니까, 이건 사소한 이기심이야. 내가 산화되어도, 우리들의 말은 세상에 녹아있도록 네가 그 종언까지 안고 가주었으면 해. 이 세계에서, 너와 내가 말을 주고받았다는, 그 형태가 남아있을 수 있도록.
“… 일어나! 아침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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