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소녀, 원이 되어 뻗어나가는 저 손은 허공을 가르며 떨어지네
교차되지 않는 이매지너리
회전목마, 하늘에 춤추며 싸움의 막을 올리고 떨궈지네
비밀을 밝힐 홀리 나이트
야쿠시마루 에츠코 메트로 오케스트라 - 소년이여 내게로 돌아와
사립 아이비아 학원 1기생, 출석번호 3번 사이카 유노 세미스피어는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를 생각한다.
자신이 본 것이 밑바닥이라도 되는 양 깊고 뜨거운 절망과 증오를 느끼고, 차갑게 식은 절대영도의 공간과도 같던 그곳을 무작정 때려치우고 나와서는 갈 곳이 없어진 저는 혼자 살아갈 것을 결심한다. 부서진 새장에 미련을 가지지 못한 그는 결코 그곳으로 눈 돌릴 생각 따위 하지 않고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저를 살피지 않았던 부모의 그늘을 스스로 태워버리니 남은 것은 꼴불견인 자신이리라. 그래, 처음 이곳으로 오게 된 건 그 이름을 버리기 위해서였다. 학원 측에서 저를 선택했다는 사실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 시절 그에게는 최선의 선택이 이것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아이비아 학원의 출석번호 3번은, 복수의 화신이 있다면 이런 사람일까 싶을 정도로 오로지 자신만의 세계에서 그들에게, 세상에 복수를 하는 것에만 몰두하였다. 불과 10일 전이다. 사실은 10의 몇십 제곱쯤은 되는 영겁의 시간이었겠지만 말이다. 적어도 지금의 그가 만들어지기 이전에 존재했던 사이카는 그랬다. 그러나 처음 맞이하는 2236년 5월 29일 즈음 되어서 3번은 그 자신 모르게 깨달은 사실과 함께 깊은 고뇌의 수렁으로 빠진다.
“어서 오세요, 사이카.”
“인사는 됐어요. 어디로 가라고 하셨죠?”
“옌 님께서 의원저로 오라 하셨습니다.”
목적지를 확인한 그는 카운터에 가볍게 묵례만 하고 익숙한 발걸음으로 게이트를 지나 의원저로 향했다. 이곳은 콜로니에서 나고 자란 그가 유일하게 지구와 접촉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자연 중력 아래에서 하는 호흡은 각별하다 했던가, 사이카는 그런 시답잖은 것을 떠올리며 구김 하나 없는 멀끔한 정장의 차림새로 발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지구에서 볼 수 있는 녹색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중에서도 경제특구인 메트로폴리스 도쿄는 연기 속이라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빌딩들이 빽빽이 들어선 도시라, 그는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이 의원저는 그에게 있어 각별한 곳이지만, 동시에 그런 도쿄에서 거의 유일하다시피 초록빛의 내음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몇 킬로만 빠져나와도 탁한 풍경밖에 보이지 않는데, 저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나 있나? 그는 홀로 설의 한다.
출석번호 3번은 절망한다. 여태껏 살아온 삶을 부정당한다. 자신의 슬픔, 격정, 고뇌, 분노를 이제서야 자기 새장을 구축하던 금빛으로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던 찰나에 그 이름―저를 묶어오고 재단한 원흉이자 동시에 자신이 거머쥐어야 할―과 그 노력과 그 감정 전부가 저기 끝도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 깊은…, 망망대해와도 같은 우주 너머로 날아가 버렸다. 두 손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오른손에 들려있던 물통이 찌그러져 물방울들만이 허공에 떠다니는데, 사이카, 아니, 이제는 사이카라고 부를 수 없는 그의 눈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어 하얀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다.
세상에서 믿을 거라고는 그 자신밖에 없었다. 의지할 곳도, 맡길 자도, 털어놓을 존재도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 없었던 3번은 그제야 자신이 걸어왔던 계단을 내려다보기 시작한다. 중간에 끊겨버린 곳은 도저히 찾을 수야 없으나, 끊긴 곳 아래로 계단이 보이는 것은 틀림없이 자신이 걸어왔던 길이라는 걸 알려주는 듯했다. 3번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새어 나오는 눈물을 짜내 물방울들과 섞여 알 수 없도록 하고, 제 눈꺼풀을 덮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게만 하던 두꺼운 안경을 벗었다. 곳곳에서 떨어지는 절규의, 부정의 목소리들을 3번이 듣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제 가슴 하나 가누지 못하는 그는 그 외침을 귀담아들을 겨를이 없었다. 무거운 눈두덩이와 함께 의식이 저리 가라앉는 느낌을 받으며 사이카는 몸에 들어간 힘을 빼고 정신을 잃는다.
똑, 똑, 똑. 하는 세 번의 노크 소리면 그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두 팔을 천천히 벌리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를 반기는 어두운 금발의 여성. 구두 소리를 내가며 사이카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옅은 미소를 띠며 그녀가 다가오기 전에 허리를 사십 오 도 정도로 숙여 ‘오랜만에 뵙습니다’라고 인사하였다. 이내 둘은 장소를 한적한 레스토랑으로 옮겨, 가벼운 식사를 들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간 잘 지냈었냐, 우리 없이 힘들지는 않으냐, 학교생활은 어떻냐 따위의 일상적인 질문들에는 깨작깨작 샐러드나 집어 먹으며 대강 대답을 한다. 특히 마지막 질문에 이르러서는 그저 웃음만 지으며 흘려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그는 도저히 식사나 시답잖은 대화에 집중할 정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쿵쾅거리는 가슴이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잠시 핀란드에 다녀왔었어. 음, 한 3주 전쯤? 응, 물론 외교 때문에도 있었지만, 아버지 무덤도 겸사겸사….”
“어머니.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저, 포레스트로 갑니다. 포레스트 제로로.”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하던 여성의 입가가 일순간 멈추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이유로 가는 거니? 노틸러스도 좋은 곳이잖아. 이미…, 결정된 사항인 거지? 네 눈을 보면 다 알아. 망설이는 게 아니고 두려워하고 있잖아. 정곡을 찔려서 입술을 꾹 짓이겼다. 그 말대로, 처음 말을 꺼냈을 때는 통보일 셈으로 왔다. 하지만 막상 저 회색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이야기하려니 제대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서, 말이라도 숙이게 되는 것이다. 여인의 시선을 슬쩍 피하더니, 사이카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꿈인가. 3번이 심해에 다다랐을 지경에, 처음은 그렇게 생각했다. 눈을 감고 깊은 바다의 수렁에 몸을 맡기고 있자니 손끝 발끝이 전부 저릿저릿해서,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아니면, 주마등인가. 아직 죽을 때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적어도 3번에게는, 그렇지 않고서야 제 머리를 치고 지나가는 필름들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살기 위해 온갖 힘을 다 썼는데. 어딘지도 모르고, 자신이 누군지도,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모르는 채로 죽어갈 거라 생각하니,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밑바닥이라도 되는 양…, 묵중하고 차갑기 그지없는 허망함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자신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지난날들의 모습이 전부, 전부 희미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시 사이카는 지금까지 자신이 올라온 계단을 내려다본다. 중간에 끊겨서는 그 공간이 보이지를 않는다. 전부 검어져서 어디가 바닥인지 허공인지, 그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다. 그 끝없는 무―니엔테― 아래에는 제대로 계단이 있지만, 저래서야 과거의 내가 이곳으로 올라올 수가 없다. 출석번호 3번은 고려한다. 지난날의 자신은 정말 자신이었나. 뼈아프게 시린 손가락 끝이 제 감각이라는 것을 지금이야 알겠지만, 아까 전의 몸을 완전히 뺏긴 그 기분을 눈을 감고서도 잊을 수가 없다. 그렇지 않아도 과도하게 들어오는 정보량을 머리가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거기서 다른 의식이 자신의 몸에 기어들어 오니, 역겨워 버틸 수가 없는 것이다.
사이카는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 쇼크로 실려 갔을 때도, 그 모든 것이 고의였단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따가운 시선들이 저를 압박해도, 안경이 무참하게 짓밟혔을 때도, 숨을 쉴 수가 없어졌을 때조차도, 머리를 잘렸을 때도 그는 눈에 불을 켜고 오로지 살 생각으로만 가득했다. 허나 도무지 지금만큼은 받아들이기도, 견디기에도 힘들었다. 3번은 가슴 속으로 한 방울, 두 방울씩 눈물을 쏟아낸다. 그 눈물도 지금 3번의 사고와 같이 곧 허공으로 흩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거의 처음으로, 끝없는 슬픔을 토해낸다. 이 현실을 가려주고 있는 무의식에 조금 고마워하다가도, 그로부터 눈을 돌리려 하고 있는 자신이 더욱이나 한심해진 나머지 더 깊고 차가운 곳으로 잠겨버린다. 지금 자신이 얼굴을 가리고 떠올리는 것들이 전부 나 자신이 아니라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해질 것만 같았다. 거짓된 친절에 놀아났던 것도, 복수를 결심했던 것도, 묵묵히 그를 위해 노력했던 것도….
애칭 붙여줄 만큼 보쿠쨩이 3번 쨩에 대해 친밀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내가… 좀 더 생각을 해야 했었던 부분이었는데…. 아무것도 안 했으니깐. 그냥 내 옆에서 가만히 내 말을 들어줬잖아. 저어… 뻔뻔함! 매정함! 너무해애~ 신기하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하는 거야~? 휴게실…, 제 어릴 적 친구 이름이에요. …미안, 재미없었다. 3번 씨가 혼자… 쓸쓸하게… 여기 있길래…. 다른 사람 걱정도 해주는 좋은 사람이구나, 하고 알았어. 정말 괜찮아? 얼굴이 빨갛다니까. 나중에 케이크라도 사다 줄까보다. 특히 단호박 케이크! 한심하다고 이야기한 적 없어. 당연히 3번 씨는 똑똑하니까, 금세 들킬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려나…. 너와 가까워질 수 없는 거잖아….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 둘 다, 사람 많은 걸 꺼려하는구나. 그랬을지도 모르겠어. …그래도, 지금이라도 괜찮지 않아? 단 거라도 먹어볼래요? 그러면 입맛이 돌 지도요.
지금 여기 있는 건 너잖아.
출석번호 3번은 고려한다. 지금 여기 있는 건 누구지? 과연 나는 정말로 내가 아닌 걸까? 그러한 생각을 하고서야 겨우겨우 3번은 방울방울 쏟아져 나오던 눈물을 멈출 수가 있었고, 짐짓 꺼졌던 불꽃을 다시 연소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저를 옥죄여오고 자신은 꼼짝할 수 없다 해도 그것은…, 분명히 자신의 감각이었다. 어렴풋이 쾅 하고 발로 무언가를 차는 소리와 웅성거리고 떠들며 웃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이게 참 희미한 빛줄기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아 그는 조금 의연해졌다. 무거운 손을 위로 뻗어 바라보니 어둑어둑하기만 하던 주위가 점점 밝아오는 것이 보이고, 제 가슴 속 불꽃은 다시 이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적어도 그 시절의 내가 하던 노력을 의식하고 있고 기억하고 있는 건 ‘나’밖에 없을뿐더러, 만들어진 존재라 하여도 이 절망과 분노는 온전한 ‘나’의 것이다. 그러한 사고에 이르렀을 즈음 겨우 이 심해를 빠져나와 손이 수면에 닿았다. 눈이 뜨이니 평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이 광경에 괜히 헛웃음만 나오더라. 3번, 사이카 유노 세미스피어는 다시 불을 지핀다. 저를 감히 지배자 따위의 자리에 앉혀놓으려 하던 터무니없는 이상주의를 향한 분노의 불길을 품었다.
영원 따위 필요없어, 그것이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이라 하여도
눈 깜짝할 새에 시간을 멈춰줘, 난 아직 잠에 빠지고 싶지 않아, 너는 내 치료제니까
지금 두드려, 두드려, 두드려줘 나의 뇌를
악몽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운명은 댓가를 요구하네
MYTH & ROID - Tregedy;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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